지난 80년간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이끌어온 미국이 관세 폭탄, 이란 전쟁, 그린란드 점령 시도로 스스로 그 질서를 흔들고 있습니다. 군 생활 중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동맹은 영원하지 않지만, 국익은 영원하다." 지금 그 말이 새삼 실감 납니다.
한국 외교: 세력권 정치의 귀환, 군에서 배운 '최악 시나리오'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이란 강대국이 특정 지역에 대해 배타적인 지배력과 개입권을 행사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힘센 나라가 이웃 나라들을 자기 마당처럼 관리하는 질서입니다.
제가 연합작전 개념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이 바로 이 구조였습니다. 동맹은 절대적 신뢰가 아니라 이해관계 위에서 유지된다는 것, 그리고 그 이해관계가 바뀌면 역할과 태도도 바뀐다는 것. 그래서 훈련을 준비할 때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전제로 시나리오를 짰습니다. 특정 지원이 끊겼을 때 어떻게 버틸 것인가를 먼저 계산하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지금 국제 정세를 보면 그 훈련이 떠오릅니다. 역사를 보면 세력권 질서가 평화를 보장한 적은 없었습니다. 19세기 내내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 제국의 분쟁, 20세기 초 발칸반도에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그 증거입니다. 세력권의 경계에 놓인 나라들이 항상 가장 큰 피해를 봤습니다. 한국이 바로 그 경계에 서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권위주의 강대국의 세력권 안에 들어간 민주주의 국가들입니다.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민주화 저항운동이 일어났을 때 소련은 군대로 진압했고, 서방은 방관했습니다. 세력권 내부에서는 외부의 개입이 차단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력권 정치의 본질입니다.
동맹의 조건, 그리고 한국이 가진 카드
동맹(Alliance)이란 공동의 안보 목표를 위해 둘 이상의 국가가 상호 방위를 약속하는 조약 관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제가 군에서 직접 겪어보니, 동맹은 종이 위의 약속만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상대방이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가 상대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 점에서 지금 트럼프 행정부의 거래적(Transactional) 외교 방식은 오히려 한국에게 협상의 여지를 줍니다. 여기서 거래적 외교란 이념이나 가치보다 경제적 이익과 실리를 우선시하는 외교 방식을 의미합니다. 냉전 시대의 이념 동맹과 달리, 우리가 내밀 수 있는 패가 있다면 협상 테이블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한국이 가진 카드는 구체적입니다.
- 조선 산업: 미 해군 함정 유지보수 및 건조 협력 가능성
- 원전 기술: 미국의 에너지 인프라 확대 수요와 맞닿는 분야
- 반도체 산업: 설계·장비·시장 모두 미국과의 협력이 생존 전제 조건
- 방위산업: K9 자주포, 천무 다연장 로켓 등 검증된 실전 전력
특히 반도체는 단순한 수출 품목이 아닙니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제재, 즉 첨단 칩 수출 통제 정책이 강화될수록 한국의 제조 역량은 미국 입장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공급망의 핵심이 됩니다. 제 경험상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상대방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구조는 군에서도, 국제정치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 협상 결과를 보면 이 구조가 잘 드러납니다. 2026년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협상에서도 한국의 제조업 협력 카드가 협상 레버리지로 활용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출처: 국방부).
다자연대, 미국도 중국도 아닌 제3의 선택지
다자연대(Multilateral Solidarity)란 두 강대국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하는 대신, 공통의 이해를 가진 여러 나라와 동시에 협력 관계를 넓혀가는 전략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전략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탈미입중(脫美入中)", 즉 미국에서 벗어나 중국으로 편입하자는 주장을 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것이 오히려 선택지를 스스로 줄이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세계는 단일 축이 아닌 다층적 네트워크 구조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국가들은 사안에 따라 협력과 경쟁을 동시에 병행합니다. 중국 세력권에 편입된다는 것은 단순히 외교 노선 변경이 아니라, 국제 규범에 대한 우리의 소망과 민주주의 체제 유지 자체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헤징(Hedging) 전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정 강대국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관계를 분산시켜 리스크를 줄이는 외교 방식입니다. 제가 군에서 배운 표현으로 바꾸면 "단일 보급선에 의존하지 마라"는 원칙과 같습니다. 보급선이 하나뿐이면 그것이 끊겼을 때 전체가 무너집니다.
일본과의 관계 강화는 그래서 전략적 선택입니다. 감정적으로 불편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와 거의 동일한 고민을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위협, 중국의 해양 팽창, 미국 동맹의 신뢰성 문제. 서로 연합하면 양국의 대외전략적 입지가 강화된다는 것은 계산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합니다. 인도 역시 14억 7천만 인구를 가진 잠재 대국이자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대표 주자입니다. 여기서 글로벌 사우스란 전통적인 서방 중심 국제질서 밖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는 신흥국 집단을 의미합니다. 이들과의 연대는 미·중 어느 한쪽에도 종속되지 않는 외교적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실제로 한국의 방산 수출 증가세가 이 방향을 뒷받침합니다. 폴란드, 체코 등 동구권 국가들이 한국산 무기를 대량 구입하는 것은 단순한 상거래가 아닙니다. 규범 기반 국제 질서를 원하는 민주국가들 사이에서 한국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2023년 한국 방산 수출 규모는 역대 최대를 기록했습니다(출처: 방위사업청).
결국 한국의 해법은 어느 한쪽에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틸 수 있는 능력을 기반으로 다자 연대 속에서 협상력과 자율성을 유지하는 방향일 것입니다. 군에서 배운 교훈이 여기서도 유효합니다. 험한 상황일수록, 판단은 냉철하게 하되 선택지는 항상 여러 개를 열어두어야 합니다. 특정 진영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게를 가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제가 오랜 시간 훈련을 통해 체감한 가장 단순하고도 어려운 원칙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외교·안보 분야의 정책 조언이 아닙니다.
참고: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353/0000055169?sid=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