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생활을 하면서 해상교통로(SLOC) 교육을 수십 번 받았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그게 그렇게까지 절박한 문제라고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지도 위에 선 몇 개 긋고 "이 바닷길이 막히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도, 평화로운 일상에서는 그냥 이론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호르무즈 해협에 한국 선박 26척과 선원 108명이 두 달 넘게 묶여 있다는 소식을 보면서, 그때 훈련실에서 배웠던 말들이 다시 떠오릅니다.
전략요충지: 지도 위의 선이 현실이 되는 순간
일반적으로 호르무즈 해협은 '중동 문제'로 분류되곤 합니다. 지리적으로 멀고, 당장 우리 일상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전혀 다릅니다. 한미연합작전 관련 상황평가 회의에서 반복해서 나온 개념이 바로 '초크포인트(Chokepoint)'입니다. 여기서 초크포인트란 해상 교통이 특정 좁은 수역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전략적 병목 지점을 의미합니다.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이 너비 33~96km의 해협을 통과합니다(출처: U.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한국은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으니, 이 수역이 흔들리면 유가·환율·물류·수출입이 동시에 타격받는 구조입니다. 이란이 해협 통제를 지렛대로 사용하는 한, 이 대치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 현재 호르무즈 해협 한국 선박 상황 요약
- 총 26척의 한국 선박이 해협 내 또는 인근 해역에 정박 중
- 한국인 선원 108명 체류 (외국 선박 승선 35명 포함)
- '나무호'는 피격 후 두바이 항으로 예인되어 수리 중 (군사적 공격 확인)
- 나머지 선박들은 카타르 앞바다 등 안전 해역으로 이동해 대기 중
트럼프 대통령이 해방 작전(liberation operation) 재개를 언급하고, 이란 의회 의장 갈리바프가 "모든 옵션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고 맞받아치는 이유도 결국 이 전략적 가치를 서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이란이 핵 문제와 별개로 해협 통제를 지렛대로 쓸 수 있는 한, 이 대치는 쉽게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대칭위협: 총성 없는 전쟁의 공포
과거 청해부대 파병 논의가 나올 때마다 현장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언젠가는 중동 분쟁의 직접 영향권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자주 나왔습니다. 그때 저도 그 우려에 동의했지만,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번 상황에서 제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비대칭위협(Asymmetric Threat)'입니다. 비대칭위협이란 재래식 전력 대신 드론, 기뢰, 소형 무인정 같은 저비용 수단으로 상대의 취약점을 집중 타격하는 전술을 말합니다. 대규모 해전 없이도 국제 물류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되고 있습니다. 나무호 피격과 화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비용은 적게 들고 효과는 엄청납니다.
[ 가성비로 밀어붙이는 '비대칭 위협' ]
- 이란의 무기: 수천 달러짜리 저가 드론, 기뢰, 고속정
- 우리의 피해: 수천억 원대 유조선 파손, 국제 유가 급등, 보험료 폭등
- 결론: 정면 대결이 아닌, 상대의 가장 약한 '경제적 혈관'을 끊는 전략입니다.
이란은 정면 군사충돌보다 전쟁도 평화도 아닌 모호한 영역에서의 압박, 즉 '회색지대 전술(Grey Zone Tactics)'로 협상력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조선 한 척이 묶이면 정유·물류·원자재 가격까지 연쇄적으로 흔들립니다. 숫자로 보던 데이터가 지금은 실제 선원들의 이름으로 들립니다.
실제로 유조선 한 척이 묶이면 정유·물류·보험료·원자재 가격까지 연쇄적으로 흔들립니다. 군 시절 이 연쇄 충격을 상황 평가 자료로 수차례 접했는데, 숫자로 보던 것이 지금은 실제 선원들의 이름으로 들립니다. 선박 안에서 공격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른 채 정부 지침만 기다리는 그 불확실성의 무게는, 군에서 경계 작전을 서던 경험에 비춰봐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일부 선박이 선박 자동 식별 장치(AIS)를 끈 채 해협을 통과했다는 점입니다. AIS를 끈다는 것은 레이더 추적을 피하겠다는 의도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에너지 수출입을 유지하려는 긴박한 움직임이 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에너지안보: 바닷길에서 결정되는 국가의 미래
일반적으로 에너지 안보는 원전이나 재생에너지 비율 같은 국내 공급 문제로만 이야기되곤 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실제 안보 논의에서 에너지 수입선의 지리적 취약성은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다뤄집니다.
에너지안보(Energy Security)란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국가 능력을 의미합니다. 한국처럼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0%를 넘는 나라에서 호르무즈 해협은 단순한 바닷길이 아니라 국가 경제의 '급소'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에너지안보를 현대 국가 안보의 핵심 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출처: International Energy Agency).
현대 안보는 국경선이 아니라 바닷길과 공급망에서 결정됩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다음 네 가지가 국가 전략 차원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합니다.
- 해군력 강화와 장거리 해상 보호 능력 확충
- 비대칭 위협에 대응하는 함정 방어 체계 현대화
-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 (미국, 호주 등 중동 외 비중 확대)
- 청해부대 등 해외 파병 부대의 임무 범위 재검토
군사적 충돌은 총성이 들리는 전선만이 아니라 경제 전체를 압박하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지금 호르무즈에 묶인 선원 108명은 국제 뉴스의 숫자가 아닙니다. 중동이 흔들릴 때마다 뒤늦게 반응하는 패턴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 이 불편한 질문들을 미리 꺼내두는 것이 맞습니다.